이 글은 덕치주의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정명령으로 백성을 이끌어 가려고 하거나 형벌로서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한다면 백성들은 그러한 규제를 간섭과 외압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될수 있으면 처벌받지 않으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부정을 저지르거나 처벌을 받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뿌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정편의 이 구절은 법가적 방법보다는 유가적 방법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입니다. 따라서 법에서 적극적 가치를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덕치주의는 법치주의에 비해 보다 근본적인 관점, 즉 인간의 삶과 그 삶의 내용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춘추전국시대는 법가에 의해서 통일됩니다. 춘추전국시대 같은 총체적 난국에서는 단호한 법가적 강제력이 사회의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덕치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의 학이라고 한다면 행정명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법치에 두는 법치는 난세의 학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법가와 유가의 차이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구절을 두가지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형과 예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명해 보는 것입니다. 법가 를 이야기 할때 다시 설명되리라 생각합니다만 사회의 지배계층은 예로 다스리고, 피지배계층은 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나라 이래의 사법 원칙 이었습니다. 형불상대부 예불하서인이지요. 형은 위로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예는 아래로 서인에게 까지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예의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여기서는 형과 예의 차이를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하지요.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듬으로서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관계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입장이비요. 사회적 질서는 이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서 의미를 갖는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회의 기본적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이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형벌에 의한 사회 질서의 확립이 더욱 시급한 당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과 예는 그 접근방법에 있어서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간관계의 개념으로 재조명해 보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서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전 춘추전국시대를 법가가 통일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통일제국인 진나라가 단명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법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진한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 해야 합니다. 진의 시기는 통일과 건국의 과정이며, 한의 시기는 이를 계승하여 통일제국을 다스려 나가는 수성의 시기라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법치와 덕치의 비교는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부끄러움에 대한 것입니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서게 되지만, 정형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 하는것 같습니다.
우수운 이야기 입니다만 교통순경이 교통법규 위반차량 네 다섯대 중에서 한 두대만 딱지를 끊자 적발되 차량 운전자가 당연히 항의를 하였지요. 저 애도 위반이라는 것이지요. 교통순경의 답변이 압권입니다. 어부가 바닷고가를 다 잡을수 있나요. 처벌받는 사람은 법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다만 운이 나쁜 사람인 것이지요.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 집단적 타락 증후군 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적 타락 증후군도 여러가지 내용이 있습니다만, 우성 이 교통법규 위반 사례와 같이 모든 사람이 범죄자 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중의 하나 입니다. 적발된 사람만 재수없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또 한가지는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 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 보다는 한마디로 고소하다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 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부정의 연쇠를 끊을수 있는 전략적 지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 이라고 할수가 있습니다.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만 저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 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 관계가 종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자하가 (시경, 위풍, 석인구절의 뜻을 공자에게) 질문했다.
아리따운 웃음과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과 검은 눈동자, 소가 곧 아름다운 이로다. 이것이 무슨 뜻 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림은 소를 한 다음에 그리는 법 이지않은가.
자하가 말했다. 예를 갖춘 다음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네가 나를 깨우치는구나.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니.
이 대화의 핵심은 이를테면 미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담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소와 보조개와 검은 눈동자 같은 미의 외적인 형식보다는 인간적인 바탕이 참된 아름다움이라는 선언입니다.
이 글에서 여러분과 이야기 하고 싶은것은 미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소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소의 의미는 인간적 품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품성이란 바로 인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도야되는 것이며 인간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조형성과 품성에 관한 논의는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조형성이 미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라고 승인하는 경우에도 그 조형성에 대한 평가기준이 문제가 됩니다. 그 시대의 조형미는 그 시대 특유의 미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의 스타와 우리세대의 스타가 조형성에 있어 차이가 있는 까닥이 그런것이지요. 얼굴 생김새가 미인이기 때문에 호감을 갖게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람의 사상이 인간적인 매력이 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미인론의 일환으로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소와 예와 인간계에 관한 논의입니다.
대체로 미인은,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통사람과는 다소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입니다. 흔히 공주병 이라고 하는 증세들이 그런것 이지요. 미인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칭찬을 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칭찬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준비된 사람 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상했던 칭찬이 끝내 없는 경우에 무척 서운한 것은 물론이지만 반면에 예상대로칭찬을 받는 경우에도 그 칭찬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감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 개인이 책임지므로서 끝나는 느낌의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기의 미모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분류하고 그러한 평가가 사람과의 관계 건설에 기초부터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지요. 더욱이 정작 필요한 것은 여러사람이 함께 일하는 경우에 나타납니다.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 하므로서 그 일익을 담당 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서 자기를 실현 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
현대는 미의 기준이나 소위 미모가 획일적이지 않은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미인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고 반대로 스스로 미인이 아니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도 상대적으로 매우 적습니다. 미인의 사회적 의미가 상대적으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미인론을 펼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를 상품화 하는 문화속에서 생활하고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과장되기도 합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상품미학에 이르면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주목되지 않습니다.
미는 글자 그대로 양자와 대자의 회의 입니다. 양이 큰것이 아름다움 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생활의 물질적 총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과 가죽은 입고 신고, 그 기름은 연료로 사용하고, 그 뼈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언해 두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것, 잘 모르는 것이 아룸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 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이 부단한 변화로서의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른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 버리는 거꾸로된 의식이 자리잡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상품미학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주변부의 종속 문화가 갖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중심부로부터 문화가 이식되는 주변부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미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우리가 미의 문제를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가 단지 미인론에 있는것이 아님을 알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점에서 미의 본령을 그 외적 형식으로 부터 인간관계의 문제로 되돌려 놓는 이 논어의 대화는 매우 뜻깊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