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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위력 1 The Power of Imagination

진정성을 가지고 2025. 3. 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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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위력 1
The Power of Imagination
소위에서 소장까지 단 6년
1923년 1월 2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2012년 8월 3일 유명을 달리한 분이 있다. 우리 아이들은 미국 우리 동네에 살던 할아버지로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장도영(張都暎)은 신의주 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도요대학 사학과를 마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모교인 신의주동중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공산당의 탄압이 시작되자 남으로 내려왔다. 군사영어학교에 다닌 후 1946년 소위로 임관했다. 한국동란을 마치고 1952년 29세로 소장 임관을 하고 1954년 별 둘을 달고 중장 진급을 했으니 기구한 한국 역사 속에서 승승장구한 군인이었다.
장면 내각에서는 육군참모총장이었다. 5·16 군사 정변에 모호한 태도로 아직도 그의 심정은 알 수 없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961년 6월 해임되고 8월 22일 중장으로 예편되었다. 이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고 1963년 3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월 형집행면제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위스콘신대학 교수를 거쳐 내가 살았던 미시간 칼라마주라는 조그만 도시에 있는 웨스턴미시간대학 교수로 1993년까지 근무를 했다. 말년에 치매와 파킨슨으로 고생하다 플로리다에서 89세로 별세했다.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훈장을 받았고 2001년에는 '망향'이란 저서를 펴냈었다. 자신의 불분명한 처신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한다며 그를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전쟁과 난세에 공을 세우고, 사형수 박정희를 구명하고 혁명세력에게 해산을 권하면서도 적극 진압을 안 했었다.
결국, 간판으로 잠시 얼굴을 빌려준 후 김종필 등의 소장파에 의해 순차를 밟아 지정된 교민도 유학생도 없는 미국의 소도시에서 긴 세월을 지내다 떠났다. 언젠가 TV에 나온 사진을 보고 아이들이 '어~ 그 할아버지네'라고 했다. 젊은 시절 짧았지만, 위세가 등등했던 할아버지의 꿈과 나라에 대한 마음을 어땠을까? 아직도 궁금하다. 8월 8일 오늘 장례식이 LA에서 있다. 숙청, 양다리, 영욕, 얼굴마담, 터무니없는 드라마의 주인공 등 역사는 누구도 서운하지 않다던 그를 점점 더 잘 조명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누구도 읽기 힘든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의 상상과 현실은 너무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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