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절은 널리 원용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안다. 는 뜻 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는 까닭은 먼저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재조명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과거란 흘러가 버린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과거는 추억의 시작 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몇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분의 주인공은 차지 하더라도 우리는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아품 때문에 다시 고통 받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등불처럼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옛 친구를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나 깨닷게 되기도 합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허약하고 잘못된 것입니다. 다음 글은 진보평론에 기고한 강물과 시간 이라는 글의 일부 입니다.
흔히 시간이란 유슈처럼 흘러가는 것 이라고 샐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가지 지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 형식일 따름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200살, 300살 이라고 대답한다.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나이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것 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거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간은 미래로 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처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래로 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비 현실적 이고도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하려는 생각 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시간을 굳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 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처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새천년 담론의 와중에서 시간의 실재성과 방향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몇가지 오류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대부분의 새천ㅁ년 담론이 이끌어 내는 결론이 그렇다. 새천년담론은 다가오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결론으로 이끌어 낸다. 이러한 미래담론의 기본 구도는 두가지 점에서 오류를 낳는다.
첫째, 미래의 어떤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이다. 그리고 둘째, 그 미래는 현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도착된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시간에 대한 도착된 관념은 결국 사회 변화에 대한 도착된 의식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 형식인 시간이 실재로 등장하고 그 실체는 현재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도 미래로 부터 다가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허구이다.
그럼에도 붕구하고 이러한 허구가 밀레니엄 담론을 지배하는 기본 틀이 되고있다. 밀레니엄 담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 읽기와 변화에 대한 대응 방식의 기본 틀이 되고있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주로 미래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 촛점을 맞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우도 같은 논리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의 차원에서 재구성 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 입니다. 우리가 논어의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통일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주역 지천태괘의 효사에서 무왕불복이란 구절을 읽었습니다.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 이었습니다. 20세기를 보내면서 새로운 새기에 대한 숱한 소망과 전망이 제시 되었지만 우리는 지금 20세기의 오만과 패권주의가 조금도 변함이 없는 참담한 현실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이 과연 21세기 인가를 회의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컨대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온고이지신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 함으로서 새로운 미래를 지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대체로 온고 쪽에 무게를 두어 옛것을 강조하는 전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온고보다는 자신에 무게를 두어 고를 딛고 신으로 나아가는 뜻으로 일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온의 의미를 온존의 뜻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단절이 온이 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옛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방법으로서의 온은 생한과 척결이라는 두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이위사의는 스승이라 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과거지사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 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릇이 되지 말아야
이 구절의 의미는 대단히 분명합니다. 여러 주에서 부연 설명하고 있듯이 그릇이란 각기 그 용도가 정해져서 서로 통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그릇은 밥그릇으로도 쓰고 국그릇으로도 쓴다고 우길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그릇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군자의 성품에 관한 것이며 유가 사상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 이기도 합니다. 또 이 구절은 막스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바로 이 논어 구를 부정적으로 읽음으로서 널리 알려진 구절이기도 합니다. 베버의 경우 기 는 한마디로 전문성입니다. 베버가 강조하는 직업윤리 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전문성에 대한 거부가 동양 사회의 비합리성으로 통한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입니다. 군자불기를 전문성과 직업적 윤리의 거부로 이해 했습니다. 분업을 거부하였고, 뷰로크라시를 거부하였고, 이윤추구를 위한 경제학적 훈련을 거부하였다고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양사회가 비합리적 이며 근대사회의 형성에서 낙후될 수 밖에 없는 원인 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막스베버의 논리가 자본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전제하고 그것을 합리화 시키는 논리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이면 자본주의의 경제체제가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동력으로 하고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를 재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뛰어넘고 그것의 대안적 모색에 촛점이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점과 관련하여 이 구절을 재 조명하고 싶은 것이지요.
오늘날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것 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 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자본가는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기를 철저하게 거부해 왔던 것이지요. 오늘날의 대자본이 벌이고 있는 사업 영역을 점검해 보는것으로 충분합니다. 크게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으로 작게는 다각적 경영, 문어발 확장이 그런 것이지요.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랫층에서 하는 일 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사람, 수레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의 노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등 점문성은 대체로 노예신분에 요구되는 직업윤리 였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에 두를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 악, 사, 어, 서, 수를 모두 익혀야 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읊고 말도 타고 활고 쏘고 창 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 시서화 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고전, 역사, 철학이라는 이성뿐만 아니라 시서화 같은 감성에 이르기 까지 두루 함양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 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원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공자의 전기 유가사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군자불기 역시 노예주 귀족들의 사상이라는 점을 부각 시키고 있습니다. 한개의 기나 부분적이고 하찮은 기예는 소인들의 것 이라는 점을 들어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요. 군자불기가 이처럼 비록 군자학으로 거론된 것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전문성 담론을 비판적으로 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는 전문성 담론이 바로 2천년 전의 노예계급의 그것으로 회기하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을 신자유주의적 자본 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 읽는 것이 바로 오늘의 독법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