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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진정성을 가지고 2022. 12. 1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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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주공에 대하여 좀 더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주공은 공자가 몇일간 꿈에 보지못해서 아쉬워 하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의 동생이 바로 주공입니다. 이름이 희단이지요.주공은 저우언라이 와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 됩니다. 어느 왕조이건 개국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혁명사에 해당하는 것 이지요. 주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특히 주나라는 이르테면 신하의 나라가 쿠데타에 의하여 세운 국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백이 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가 임금을 치는것의 부당함을 간 하다가 듣지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고사가 바로 이때의 일 입니다.

  개국 초기의 권력관계가 매우 복잡합니다. 무왕이 동생 주공을 노나라에 봉 했지만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을 때 여서 주공은 아들인 백금을 대신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남아서 계속 무왕을 보좌해야 했습니다. 당시 72제후국중 희씨가 55국으로 압도적으로 장악 했지만 여씨가 17국으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주나라는 서쪽에 있던 산간의 제후국 이었는데 남하하여 위수평야로 이동하고 문왕때에 태공망 여상을 얻어 강대해 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강족과 주족의 연합이었습니다. 17개 제후국을 장악한 여씨가 바로 여상의 강족 입니다. 여상은 문왕과 연합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고 결국 무왕때에 이르러 은나라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여상이 바로 강태공 입니다. 문왕을 만나기 까지 곧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두고 세월을 낚고 있었다는 강태공입니다. 병법과 지략에 뛰어난 전략가로서 육도삼략의 저자이며 무왕의 장인 이기도 합니다. 강력한 정치세력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력을 변방인 산동성으로 거세시킨 것도 모두 주공의 정치적 수완에 의하여 가능한 것 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무왕이 은나라를 징벌한 후 마지막 임금 주의 아들무경녹부를 후에 책봉하여 은나라 유민을 그에게 복속 시켰습니다. 은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무왕은 그의 두 동생관숙선과 채숙도를 무경에게 사부로 붙였는데 무왕이 죽자 무경과 두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동생인 관숙선을 죽이고 채숙도를 추방합니다. 그리고 은나라 유민을 모아 주의 형인 미자를 따르게 하고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 부근인 송에 나라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미자는 송의 시조가 됩니다. 송은 은나라를 계승한 주나라의 제후국이 된것 이지요. 이 송나라와 인접한 나라가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이며 이 노가 바로 주공이 봉해진 제후국 입니다.

  주공은 조선시대의 세조와 같이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군권을 장악할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끝까지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닦았습니다.

  주공은 일반삼토, 일목삼착 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 입니다. 한끼 밥먹는 동안에도 세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번 머리감는 사이에도 세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간다는 것 이지요.

 여기서 잠시 중국의 고대사에 대하여 몇가지 언급해 드는것이 필요합니다. 중국 고대의 제왕 계보는 황제-전욱-제곡-요-순-우-탕-문-무-주공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화제이하 요, 순까지는 가공의 인물로 보이는 것이 통설 입니다. 반면에 하우는 실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서경 우공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하의 건설지로 알려진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와 그 주변지역에 있는 궁궐 터, 분묘등의 유물과 유적은 당시에 이미 권력과 계급이 존재 했음을 증거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염지유적은 그곳이 경제적 중심지 였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그리고 갑골문자 또는 복사의 존재라든가 우의 아들 계가 왕위를 세습하므로서 비로소 세습왕조가 시작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일반적으로 는 하로부터 실재한 왕조로 인정하는 것이 현재의 통설입니다.

  기원전 1760년 경에 이 하를 멸망 시키고 세운 나라가 은입니다. 원래는 상 이었는데 주가 상을 징벌한 후에 수도의 이름을 따서 은나라로 낮춰 불렀습니다. 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 28대 주왕을 무왕이 멸하고 주를 세웠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1100년경 이었습니다.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 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해야 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습니다. 나는 이 무일 편에서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 하는것 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 하는것 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 이지요.

나는 이 무일 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것이 습관 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부편함이 정어리를 살아있게 한다는 것 이지요. 무일 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한번 되씹어 보시기를 바라는 것 이지요.

  그리고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 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 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노인들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을 반성하는 교훈으로 읽히기 바랍니다. 석지인 무문지 에서 노인들은 아는것이 없다고 업신 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대였음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IMF 사태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퇴직 연령이 낮아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과거의 지식이 빨리 폐기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노인들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ㅣ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 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 입니다. 물론 도시 유목민이 정보화 사회의 미래상 이라는 전망이 없지 않습니다. 농본 문화에서 유목문화로 전환되는 과정이 현대라는 것 이지요. 노인 퇴출은 그러한 전환기의 부수적인 현상 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유목문화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가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새로운 초원을 찾아가는 것 이지요. 노인들의 경험 문화는 주변화 되고, 정년들의 전위문화가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류의 정신사는 어느시대에나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모색해 가게 마련입니다. 농본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인들의 지혜와 희생이 역사의 곳곳에 뭍혀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이 그렇습니다. 할머니들은 자기의 자녀가 아니라 자기의 자녀가 낳은 자녀 즉 손자손녀를 돌보고 자녀 양육에 필요한 여러가지 지식을 전수 하므로서 가족 집단을 번창 시켰다는 것 이지요.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약 3만년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앤스 는 그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 비하여 노년층의 비율이 무려 다섯배나 증가했음을 밝혀낸 것 입니다. 노인세대의 비율이 급증한 시기는 바로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있었던 시기였으며, 인류가 장신구를 사용하고 동굴벽화를 그리고 장례 행위를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든 세대의 경험과 역할이 현생 인류의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을 가져온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이러한 할머니 역할은 그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 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하십니까. 미래는 과거로 부터 오는 것 입니다. 미래는 외부로 부터 오는것이 아니라 내부로 부터 오는것 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 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피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 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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