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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과 평화

진정성을 가지고 2023. 1. 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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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붕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에서 먼저 지적해야 하는 것은 화와 동을 대비의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양학 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 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 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서 그 뜻이 들어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시의 대련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개념은 차이를 규정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됩니다. 소위 독특의 의미는 그 독특한 의미를 읽는 것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을 함께 읽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할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서 비로소 들어나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표현에 의하면 관계 맺기와 차이 짓기, 즉 디페랑스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이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차이란 두 실체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형성하는 두 개의 독립 항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의 경우에는 이러한 독립 항목이 전제되지 않는 것이지요. 모든 것에 대한 차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차이가 본질이 되는 역설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동양적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대비의 방식은 이러한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우회하고 뛰어넘는 탁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통체적이기 때문에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법, 즉 개념적 방법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인식 과정의 불가피한 방법상의 문제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항 대립적 차이이건 또는 모든 것과의 차이화를 통한 개념 구성이든 상관없이 차이 짓기 방식은 결과적으로 부분에 매몰되게 함으로써 정체의 모습을 못 보게 하지요. 대비방식은 이러한 차이화에 대한 경계이며 분과 석의 방식에 대한 반성이라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에서 근대성과 다른 일면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이란 어차피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 대한 일차적 인식으로서의 이른바 감성적 인식은 부분적 인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는것임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 분리된 대상을 더욱 정치하게 개념화 하는 방삭은 전체와의 거리를 더욱 확대할 뿐 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심화 과정에서 대상 그 자체가 관념화 된다는 사실이지요. 이에 비하여 대비의 방식은 분리된 대상을 다시 관계망 속에 위치시킴으로서 대상 그 자체의 관념화를 어느정도 저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동양학에서 대체로 대비의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은 동양학 그 자체가 관계론적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어의 이 화이부동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는 화와 동을 대비로 보지 않습니다. 화를 화목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의미로 해석하고 동을 부화뇌동과 동일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어느 경우든 화와 동이 대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동의 의미도 첫 구와 다음 구에서의 의미가 각각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구에서는 부화뇌동 즉 자신의 분명한 입장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다음 구에서는 동일함 즉 차이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동일 시종 윤리적 수준에서 해석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라면 새롭게 재조명할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의 이 화동론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들어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존중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 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해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저는 이 이야기의 서론 부분에서 중국이 추구하는 21세기의 구성 원리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문명을 가장 앞서서 실험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자부심에 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대륙적 소화력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러한 강력한 시스탬이 작동해 왔던 것이 사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이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이 되는 강력한 대륙적 시스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 이라는 것이지요.

 

  유럽 근대사는 존재론적 논리가 관철되는 강철의 역사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차례 이야기 했습니다. 근대사의 정점에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패권적 구조를 적나라 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논리가 바로 존재론의 논리이며 지배, 흡수, 합병이라는 동의 논리입니다. 종교와 언어까지도 동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식민지 역사를 경험했지요. 그러므로 동의 논리를 극복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자 하는 중국적 의지에 대해서는 일단 그 역사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 만들어 내고자 하는 새로운 문명이 근본에 있어서 또 하나의 도일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중화주의는 철저히 문화적인 것이며 결코 패권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설령 그러한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화주의란 군사적 강제나 정치적, 경제적 강제를 인정한다는 의미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다른문화, 다른가치, 그리고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관용과 공존을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근본에 있어서 얼마든지 또 하나의 동이 될수 있다는 것이지요.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 도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저는 극좌와 극우가 다같이 동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구성 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서 자기를 강화 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서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 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화동담론이 우리의 통일론 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같는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로 대립하고 있고 또 지금까지 흡수합병이든 적화통일이든 기본적으로 동의 논리에 따른 통일론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통일론을 동의 논리가 아닌 화의 논리로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입니다. 화의 논리는 무엇보다 먼저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통일 과정을 이끌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존과 평화의 정착은 통일 과정에서 요구되는 전 과제의 90%를 차지 할 만큼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공존과 평화 정착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 이후부터는 대체로 신간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화의 원리는 통일 과정의 출발점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종착점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우리의 통일 과정에 있어서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가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구도를 모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화의 원리는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세계사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화의 원리로 우리의 통일 과정을 이끌어 가는 노력은 통일 이라는 민족적 과제로부터 세계사적 과제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조교화 되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화의 논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물론 보다 종합적이고 심도있는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동담론을 고담준론으로 이끌어가고 말았습니다만 논어의 이 구절을 일상적 의미로 읽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자기 흉내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 법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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