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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무서운 규제장치 입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2022. 12. 1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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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경에 이어 서경의 한편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경은 2제 3왕의 주고 받은 언, 즉 말씀을 기록 한 것 입니다. 유가의 경전이 되 전에는 그냥 서 또는 상서라고 했습니다. 중국에는 고대부터 사관에 좌우 2사가 있었는데, 좌사는 왕의 언을 기록하고 우사는 왕의 행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각각 상서와 춘추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자의 언행을 기록하는 이러한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 입니다. 그리고 동양 문화의 특징 이기도 합니다. 사후의 지옥을 설정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구속력이 강한 규제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죽백에 드리우다 라는 말은 청사에 길이 남는다는 뜻 입니다. 자손 대대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은 대단한 영예가 아닐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악명과 죄업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은 대단한 불명예요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임금의 언행을 남기는 것은 물론 후왕이 그것을 거울로 삼아 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서경을 평하여 정에 장 하다고 하였습니다. 서경에는 수많은 정치적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통하게 되면 정치력을 높일수 있다는 뜻 입니다. 서경 춘추와 같은 기록문화는 후대의 임금들이 참고할 수 있는 사례집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어떠한 제도볻다도 강력한 규제장치로 작용 하리라는 것은 상상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처럼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 전통은 농경민족의 전통이라 합니다. 농경민족은 유한공간 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기록은 물론 자연에 대한 기록에서 시작합니다만 이러한 문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발전합니다. 2제 3왕의 주고받은 어록인 서경이 탄생되는 까닥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홍위병 들이 붉은표지의 마오쩌뚱 어록을 흔들며 행진하는 광경을 보고 매우 의아해 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연히 마오어록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유일 지배체제의 상징같은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오어록은 중국의 전통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 이지요.

  중국의 전통에 이러한 기록의 문화가 있다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 이지만이러한 기록이 보존되고 부단히 읽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 입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난 후에 서적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매장하는 문화적 탄압, 이른바 분서갱유를 하게 되지만 그는 무엇보다 천하통일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문자를 통일합니다. 이 문자의 통일은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고대문자와 고대 기록의 해독을 가능하게 한 것 입니다. 우치우위는 그의 세계문명기행 에서 시저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랙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과 이집트사를 포함한 장서 70만권을 소각한 사실, 그리고 그로부터 400여년 후 로마황제가 이교를 금지하면서 유일하게 고대 문자를 해독 할 수 있었던 이집트 제사장들을 초방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의 고대문자 해독능력이 임멸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사에 있어서 기록의 의미는훨씬 더 커지는 것 이라 할수 있습니다.몇천년전의 기록이 마치 몇일전에 뛰운 편지처럼 읽혀지고 있는 유일한 문명이라는 것 이지요.

  서경은 본래 하 은 주의 사관이 작성한 것으로 3천편이 있었는데, 공자가 100여편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습니다. 현재 전하는 서경은 58편 인데, 25편은 고문, 33편은 금문입니다. 금문상서는 진의 분서 이후 구전 되다가 한대의 언어로 정착된 것 입니다. 고문상서는 전한 경제때 노공왕의 궁실을 넓히다가 공자의 구택 벽에서 얻은 벽경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발견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의 고문상서는 동진의 매색이란자의 위작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금문상서 역시 주공 전후의 여러편이 먼저 성립되어 가장 오랜부분이고 그 다음에 은 부분이 추가되고 그리고 하, 다시 요, 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가상학설이 일반적 견해 입니다.

  최초에 주 왕조의 창건자인 문왕, 무왕, 주공을 중심으로 기록했으나, 유학자들이 국가의 권익을 높이기 위해 전설적 제왕들에 관한 단편적 기록들 까지 추가 했을 것 으로 추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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