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 군사,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를 버려라. 만약 나머지 두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 몌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격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언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은 정치란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며 백성들의 신뢰가 경제나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천명한 구절입니다. 자공은 호상으로, 공자의 주유에 동참하지 못함을 반성하여 공자 사후 6년을 수묘한 제자입니다. 그리고 공자 사후에 자신의 재산을 들여 공자 교단을 발전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리하여 공자는 자공과 함께 부활했다고 하지요.
공자가 국가 경영에 있어서 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천명한 까닭은 물론 그 기능적 측면을 고려해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국경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신뢰를 얻으면 백성들은 얼마든지 유입될 수 있었지요. 그리고 백성이 곧 식이고 병이었습니다. 백성으로부터 경제도 나오고 백성으로부터 병력도 나오는 법이지요.
이처럼 백성들의 신뢰는 부국강병의 결정적 요체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논어의 이 대화의 핵심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니라 재상으로 신상필벌이라는 엄격한 법가적 개혁의 선구자로 알려진 상앙 에게는 이목지신 이란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상앙은 진나라 재상으로 부임하면서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 원인은 바로 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대궐 남문 앞에 나무를 세우고 방문을 붙였지요. 이 나무를 옮기는 사람에게는 백금을 하사한다. 옮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금을 천금으로 인상 하였지요. 그래도 옮기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상금을 만금으로 인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금을 기대 하지도 않고 밑질 것도 없으니까 장난삼아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방문에 적힌 대로 만금을 하사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라의 정책이 백성들의 신뢰를 받게 되고 진나라가 부국강병에 성공하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만, 무신불립,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일하입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신은 그 글자의 구성에서 보듯이 인+언의 회의로서 그 말을 신뢰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신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라고 풀이되고 있지만 언은 원래 신에게 고하는 자기 맹세이므로 신이란 곧 신에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 간의 믿음이라는 뜻은 후에 파생 되었다고 보지요. 그만큼 신의 의미는 엄격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정의 의미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해야 합니다. 정政은 정正입니다. 그리고 정이란 뿌리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정치란, 우리나라 제도 정치권의 현실처럼 정권 창출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정치를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으로 규정하기도 하고, 정치란 계급 지배의 방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논의해 두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정正은 정整이며, 정整은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 하는 것 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 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잊지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번지가 인에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이다. 이어서 지에대해 질문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란 지인이다.
논어에서 인에대한 공자의 답변은 여러 가지입니다. 묻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안연에게는 인이란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 이라고 답변 하였고, 중궁에게는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 이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의 의미는 특정한 의미로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답을 하고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 질문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에게 맞는 답변을 공자는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을 애인 즉 남을 생각하는 것 이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지는 공자가 타고 다니는 수레를 모는 마부입니다. 늘 공자를 가까이 모시는 사람입니다. 물론 제자입니다. 번지에게 인의 의미를 애인으로 이해시키려고 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위의 여러 가지 답변에 공통되는 점이 타인과의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극기복례는 공과 사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며, 기소불욕 물시어인은 나와 남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마우 에게 이야기한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경우는 더욱 철저합니다.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한 까닭은 자기가 한 말을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말을 더듬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말은 다른사람과의 약속이란 뜻입니다. 이 역시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에관한 공자의 답변은 그 언표에 나타난 의미와 앞뒤의 문맥으로 보면 비교적 간단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이어지는 대화는 곧은 사람으로서 굽은 사람을 바르게 만드는 일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제왕 건은 보통 사람의 세배나 되는 재주가 있었지만 현자를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의 포로가 되었다고 지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란 사람을 알아보는 것, 즉 인재를 판단하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란 지인이다. 라는 단호한 선언이 실용적 의미로 왜소화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논어 전체의 구상에서 보더라도 그럴 뿐만 아니라 인과 지, 애인과 지인은 논어의 근본 담론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 일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인간과 관련이 없는 지식이 과연 존재 하는가. 없습니다. 자연과학적 지식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적 당파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지요. 모든 지식은 사람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는 법입니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타인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한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어떤 측면에 주목할 것인가에 고민하기도 하고 그 사람에 관한 파일을 구하거나 그 사람에 대한 다른사람들의 견해를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위해서는 그가 나를 아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대상물과는 달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하물며 자기의 알몸을 보여줄 리가 없지요. 지와 애는 함께 이야기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인식의 혼란을 가져오는 엄청난 정보의 야적은 단지 인식의 혼란에 그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폄하 하게 할 뿐입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파는 사회이며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 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회입니다. 상품가치와 자본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습니다. 지는 지인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한 사회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