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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位 와 응應

진정성을 가지고 2022. 12. 2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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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역 사상의 핵심을 관계론 이라고 하는경우 지금 설명 하려는 위 와 응의 개념이 바로 그것을 의미 합니다. 위와 응 이외에도 주역의 관계론을 읽을 수 있는 여러가지 개념이 있습니다만 위 와 응에 대해서만 설명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역의 독법에서 가장먼저 설명해야 하는 것이 위 입니다. 즉 자리입니다. 어떤 효의 길흉화복을 판단할때 그 효과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고 판단합니다. 대성괘는 여섯개의 효로 이루어 졌기 때문에 1,2,3,4,5,6의 여섯개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여섯개의 자리 중에서 1,3,5는 양효의 자리이고 2,4,6은 음효의 자리 입니다. 양효가 양효의 자리 즉 1,3,5에 있는 경우와 음효가 음효의 자리인 2,4,6에 있는 경우를 득위라 합니다. 효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 이를 실위라 합니다. 양효가 음효의 자리 즉 2,4,6에 있거나 마찬가지로 음효가 양효의 자리인 1,3,5에 있는 경우가 실위입니다.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 입니다. 양효라고 해서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의 설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흠효도 어떤 자리에 있거나 음효일 뿐 이라고 하는 고정된 과념은 없습니다.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을 인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는 것 이지요. 역지사지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 는 표현을 합니다. 눈이 얼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있다는 뜻이지요.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입니다. 당파성과 계급적 이해 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저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빕터보다 집이 크면그 터의 기가 건물에 눌립니다. 고층빌딩은 지기를 받지 못하는 건축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땅에 건물을 너무많이 쌓아놓았다고생각하지 않습니까. 뉴욕이나 도쿄 역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터와 집의 관계뿐만 아니라 집과 사람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 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자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지요. 그 30의 여백이야 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 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미달의 불량품 으로 채우게 되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잘못된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서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 없이 너나 할것 없이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 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여담이었습니다만,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 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속에 있지않고 개체가 발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와 실위의 개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 과는 다른 동양학의 관개론입니다.

 

  위 와 응에 대해서만 설명하려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몇가지 개념을 더 이야기 해야 할것 같습니다. 먼저 중의 개념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대성괘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개의 효 중에서 제2효와 제5효를 중 이라 합니다. 2효와 5효는 각각 하괘와 상괘의 가운데 효 입니다.

  주역에서는 이 가운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제일 위에 있거나 제일 앞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쟁사회의 원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여러분도 질문하라고 하면 묵묵부담인 겨우가 많을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는 것이지요. 중간은 무난한 자리라고 생각 할것 입니다. 산전수전을 두루겪으신 노안들은 대체로 모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그저 중간만 지켜지기를 충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간과 가운데를 선호하는 정서는 매우 오래된 것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도물론 중간을 매우 선호하는 편 입니다만, 그 선호하는 이유가 무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둑 7급이 바둑친구가 가장많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바둑 1급은 비슷한 상대를 만나기 쉽지않습니다. 중간은 그물처럼 앞 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 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선망의 적이 되고있는 선두는 물론 스타의 자리입니다. 최고의 자리이지요. 그 자리는 모든영광이 머리위에 쏟아질 것 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매우 힘든 자리입니다. 경쟁으로 인한 긴장이 가장 첨예하게 걸리는 곳이 선두이기 째문입니다. 그리고 선두가 전체국면을 주도 할 것 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두는 겨우 자기한몸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한 처지입니다. 그와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편한 자리인것 만은 틀림없습니다. 아마 가장 철학적인 자리 인지도 모릅니다. 기를 쓰고 달려가야 할 곳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비록 편안하고 한적한 달관의 공간이긴 하지만 그곳은 무엇을 도모하거나 실천 하기에는 너무나 후미진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관계 맺기가 어려운 매우 적막한 처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자장 힘든 자리로 칩니다. 막상 가장 위에있는 제6효인 상효는 물러난 사람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음효가 음의 자리에 양효가 양의 자리에 있는 것을 정 이라고 하면서도, 가운데 효 즉 중이 득위 했는가 득위하지 못했는가에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음2효와 양5효는 중이면서 득위했기 때문에 이를 중정 이라 합니다.

  중정은 매우 높은 덕목으로 칩니다. 아마 여러분은 중정이란 현판이나 붓글씨를 많이 보앗으리라 생각합니다. 같은 중정이지만 양5효를 더욱 중요하게 봅니다. 음2효가 하괘를 주도하는 효 임에 비하여 양5효는 상하 괘 전체의 성격을 주도하는 효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응 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위가 효와 그 효가 처한 자리의 관계를 보는 것 임에 비하여 응은 효와 효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효가 다른 효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여섯개의 효 중에서 1효와 4효, 2효와 5효, 3효와 6효의 음양 사응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1,2,3효와 상괘의 1,2,3효가 서로 음양 사응관계, 즉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보는것이 응 입니다.

  주역 사상에서는 위보다 응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칩니다. 이르테면 위의 개념이 개체 단위의 관계론 이라면 응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 내는 관계론 입니다. 이를테면 개체간의 관계론 이지요. 그런 점에서 위가 개인적 관점이라면 응은 사회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 보다는 상위 개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위 도구요 불응 도구이다. 그러나 실위더라도 응이면 무구이다. 하고 합니다. 실위도 허물이고 불응도 허물이어서 좋을것이 없지만 설령 어느 효가 득위를 못했더라도 응을 이루고 있다면 허물이 없다는 것 이지요. 

  위보다 응을 더 상위 개념으로 치는것이 주역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 입니다. 집이 좋은것 보다 이웃이 좋은것이 훨씬 더 북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직장의 개념도 바뀌어서 최근에는 직장 동료들이 좋은 곳을 좋은직장으로 칩니다. 위가 소유의 개념 이라면 응은 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 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응 이외에도 효와 효의 상응관계를 보는 개년으로 비 가 있습니다. 이 비는 인접한 상하 두 효의 상응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응이 하괘와 상괘간의 상용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이 비는 인접한 두 효의 음양 상응을 본다는 점에서 응에 비해 다소 그 관계의 범위가 협소하고 시간대가 짧습니다. 그러나 기본적 성격은 관계론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상에서 주역 독법의 몇가지 개념을 소개 했습니다만, 그나마 너무 간략한 설명 이었습니다. 주역의 주석시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관념적인 해석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오히려 주역 이해에 더 장애가 됩니다. 음효 위에있는 양효 즉 양재 음성인 겨우를 기 라고 하고 그 의미는 공제입니다.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음효가 양효 아래에 있는 경우는 승 이라고 합니다. 즉 음재양하인 경우를 승이라 하고 그 의미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같은 음효라 하더라도 그것이 양효위에 있을때 즉 음재양상 일때 승 이라 칭하고 그 의미를 반상 즉 역 으로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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