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이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 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 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질서라는 의미는 이를테면 시스탬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만, 장 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이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력장, 중력장, 전자장과 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체계이며 질서입니다.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조화 통일되어 있습니다. 모든것이 조화 통일됨 으로서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됩니다. 관계들의 총화 입니다. 중요한것은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이 집합과 장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은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이며, 개개의 부분이 곧 총체인 구조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장의 개념이 3차원의 공간적 개념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멸, 유전이 이루어지는 4차원의 질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점에서 동양학에서 자연이란 자원이 아닐뿐 아니라 인간의 바깥쪽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무궁한 시공으로 열려있는 질서입니다. 우주라는 개념도 우와 주의 복합적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는 공간 개념입니다. 상하사방이 있는 유한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집니다. 주는 고금왕래 의미입니다. 시간적 개념입니다. 무궁한 시간을 의미합니다.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써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의 장 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생설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것은 모든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것은 생주이멸의 순환 과정속에 놓여있는 것 이지요.
경기도 이천의 도자기 마을에서는 도자기가 익고난 다음 가마를 열면 맨 먼저 도공이 망치를 들고 들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것 들을 모조리 깨트린다고 합니다. 열을 잘못 받아서 변색이 되거나 비뚤어진것은 가차없이 망치로 깨트리는 것 이지요. 예술가 특유의 고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문에 쌓이는 도자기 파편으로 산천이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그릇이 진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생성의 질서가 깨어진 것이라 할수 있는 것이지요. 진흙이 그릇이 되고 그릇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릇이 그릇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즉 자기를 고집한다면 생성 채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목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생산과 과잉축척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것이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토 중심일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속에서 특정 분야의 불균형 적인 자기 확대가 곧바로 다른것과의 생성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도성장과 과잉 축적이 이러한 생기의 장을 파괴하는것임은 물론입니다.
생기의 장으로서의 자연 개념은 현실적인 삶에서 욕망의 절제로 나타납니다. 절용휼물, 안빈낙도 하는 삶의 철학으로 나타납니다. 봄 여름에는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지않고 촘촘한 그물로 하천에서 고기를 잡지않는 것 이지요. 동양사상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 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양학 에서는 자연을 '생기의 장' 이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자연은 존재하고 있는 것 중의 최고, 최량의 어떤 것 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은 최고의 질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