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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미제 火水未濟

진정성을 가지고 2022. 12. 2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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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수미제괘는 64괘의 제일 마지막 괘 입니다. 마지막 괘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화수미제괘는 물위에 불이 있는 모양입니다. 

  화수미제괘의 경우도 괘사와 단전, 상전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괘사를 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제괘는 형통하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

 

  강을 거의 다 건넜다는 것은 일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꼬리를 적신다는 것은 물론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만, 작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으로 이해 할수 있습니다. 효사에 머리를 적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분명 꼬리를 적시는 것에 비하여 더 큰 실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단전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제괘가 형통하다고 하는 까닭은 음효가 중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다 함은 아직 강 가운데로 부터 나오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다고 한 까닭은 끝마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효가 득위하지 못하였으나 음양상응을 이루고 있다.

 

  미재괘에서 중요하게 지적할수 있는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 제5효가 음효라는 사실을 이 괘가 형통하다는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5효는 양효의 자리 입니다. 그리고 괘의 전체적 성격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자리입니다. 그래서 중 이라 합니다. 대체로 군주의 자리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중의 자리에 음효가 있는것을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제괘의 경우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중 에 음효가 오는 경우를 길형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전의 해석에 근거하여 동양사상에서는 지와 음의 가치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중장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음과 양을 합하여 지칭할때 양음이라 하지않고 반드시 음양이라 하여 음을 앞에 세우는것도 그러한 예의 한가지라 할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을 기본적으로 땅의 사상이며 모성의 문화라는 것 이지요. 빈부라 하여 빈을 앞세우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하는것은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끝마치지 못한다. 능 일련의 사실입니다. 나느 이 사실이 너무나 당연한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행동을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끝날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 무엇하나 끝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리 없습니다. 마칠수가 없는 것 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라는 것이 있을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괘의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록 (모든효가) 마땅한 위치를 얻지 못하였으나 강유, 즉 음양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것도 매우 의미심장 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와 응 을 설명하면서 비록 실위이더라도 응이면 무구, 즉 허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위가 개체 단위의 관계론 이라면 응은 개체간의 관계론으로 보다 상위의 관계론이라 할수있다고 하였지요.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 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응, 즉 인간관계를 디딤돌로 하여 재기하는 것이지요. 작은 실수가 있고, 끝남이 있고, 다시 시작할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 등등을 우리는 이 단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상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불이 물위에 있는 형상이다. 다 타지 못한다. 군자는 이 괘를 보고 사물을 신중하게 분별하고 그 거처할 곳을 정해야 한다.

 

  이상에서 본것이 미제괘의 괘사와 단전, 상전입니다. 저는 이 괘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미제괘가 왜 주역 64괘의 마지막 괘인가 하는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주역을 읽었을때는 미제괘가 꼭 저를두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았지요. 마지막 단계에 작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끝판이라고 방심하다가, 아니면 널른 마무리 하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서 미제괘를 읽고 난 후로는 어떤일의 마지막 단계가 되면 속도를 늦추고 평소보다 긴장도를 높이어서 조심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 했습니다. 그러나 미완성괘가 주역의 마지막 괘라는 사실의 의미는 그런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최후의 괘가 완성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위에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싱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항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 이라면 남는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 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 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 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 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 이기도 하고, 자기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 이기도 합니다.

 

  제가 글씨로 즐기는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 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 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한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 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 하지 않으면 진미 할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 할수 없는 법 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저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메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 보다는 생산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수미제괘 에서 머무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냈습니다. 주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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